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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의 추억.......................(쟁신칠인)

천량성 2017. 2. 11. 10:10

1990년경 인사동거리에 화장품가게가 있었고

옆 가게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한국음식과 고기를 파는 음식점이 있고

주변은 화랑.표구점.지업사.민속주점.민속품가게 등이 있었다.

지금과 같이 음식점은 많지 않았고 골동품과 고미술품을 거래하는 가게들이 많았었다.

 

27여년전 인사동거리의 그 화장품가게는 집사람이 하는 가게다.

그곳은 동네 사랑방역할을 하며 인사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개업식때 떡과 북어 몇가지 음식을 하고 점쟁이할머님을 모셔와

고사를 지내고 주변 가게에 떡을 돌렸었다.

 

어느 음식점에가니 경찰4명이 저녁식사를 하길래 떡을 더 가져와 드리고 왔다.

고사를 저녁에 하고

음복.飮福(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이나 떡같은 것을 나누어 먹음) 

으로 막걸리 한잔하니 지인들이 찾아와 물건도 팔아주고 바쁜와중에

점쟁이할머니를 집에 모셔 드리라는 마눌의 명을 받들어 차를 가지고

인사동 골목을 빠져나가려는데 음주검문을 하고 있었다.

 

별생각없이 측정했는데 음주운전에 걸리고 말았다.

오늘 가게를 개업해 음복주 딱 한잔 했는데 너무 억울하다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차에서 내려 조사를 받으란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재수도 더럽게 없다고 투덜대며 차에서 내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까 음식점에서 고사떡을 주었던 교통경찰들 이었다.

이때부터 기가살아 펄쩍 뛰며 "내가 수고하신다고 고사떡 드린거 아시지 않느냐,

화장품가게 개업하고 음복주 한잔한걸 아시니 그냥 보내달라하니

경찰들도 생각이 나는지 다음부터 조심하라며 보내주었다.

이것이 운이나빴던건지 좋았던건지는 며칠후에 나타나게 된다.

 

나를 그냥 보내준 경찰중 한명이 화장품가게로 찾아와 너스레를 떨며

며칠전 남편께서 음주운전한걸 자기가 봐줬다고 생색을 내니

눈치빠른 마눌이 남성화장품 몇개를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화장품만 떨어지면 찾아와 그냥가져가는 것이었다.

인사동에서 화장품가게를 그만둘때까지...........................

 

그 일이 있고난 후 나는 절대 음주운전을 하지 않는다.

큰 죄인같이 인격이 무시된채 취재당하고보니 절대로 음주운전을 안한다,

지금까지..................... 

 

인사동과 인연맺으며 겪었던 일들이 소소하게 있는데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건 음주운전 사건이다.

어쩌다 인사동에 가면 일부러 그 곳을 찾아가 기웃거려본다.

나의 30대 초반의 젊음과 추억을 기웃거려 보곤 한다.

 

인사동은

종로구에 위치한 법정동의 명칭.일반적으로는 골동품.화랑.표구.전통공예품.

전통찻집.전통음식점 등이 집중되어 있고,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이며 관광객이 많이 상주인구보다 유동인구가 많다.

 

일제 강점기부터 골동품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들 상점들은 문화제 수탈의창구역할을 했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당시 33인이 모였던

태화관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있다.

 

대사동(댓절골) 이란 명칭도 잇었는데 이 지역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조선시대에는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원각사라는 큰 절은 지금의 조계사다.

 

서울시는 1988년에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 로 지정하였고

2002년 4월 24일에는 "제 1호 문화지구"로 지정했다.(백과사전 참조)

 

 

 

쟁신칠인(諍臣七人) 바른말로 충언하는 신하 7명만 있으면 천하를 잃지 않는다.

 

천자는 바른말로 충언하는 신하가 7명

제후는 5명

대부는 3명

선비나 친구는 1명

부모는 바른말을 해주는 자식이 있다면 불의에 빠지지 않는다.(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