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중학교를 여의도로 다녔었다.
가끔씩 불현듯 떠오르는 여의도는 마음한구석에
기름종이로 새겨놓은 것처럼 각인되어 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시범학교를 만든다고 남학생 3반
여학생 3반으로 총 6반을 만들어 선진국 같이
적은 학생을 보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였다.
다른 중학교는 어떻는지 모르지만 방학때는
동대문 운동장 수영장을 빌려 수영을 가르쳤고,
스케이트도 가르쳤었다.
학교옆에 시범아파트가 고층으로 들어선 이후로 아파트 투기의
시발점이 되어 여의도의 절반은 아파트 숲으로 변해갔다.
그로인해 전학오는 학생들이 넘쳐나 총 6반 10반으로 늘어나며
시범학교라는 취지가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시범아파트 단지내 상가를 아케이트라는 말로 불리며
아파트상가의 또 다른 이름의 선두 주자가 되었었다.
반아이들의 대부분이 여의도에 거주하기 때문에 배정을 받았지만
한반에서 10여명은 다리건너 영등포에서 배정 받아온것이었다.
어린나이지만 빈부의 차이를 느낄수 있었고 아케이트란 단어 같이
보온도시락이라는 단어도 처음듣고 보았었다.
까만 사각통을 어깨에 걸수있게 되었는데 점심때가 되어 보온도시락 뚜껑을 열면
그 추운 겨울에도 김이 모락 모락나는 것을 부러움에 가득차 보곤했었고
보온도시락을 같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었다.
그때는 회수권을 사가지고 다녔는데 학교가 파하면 버스는 타지 않고
삼삼오오 걸어오며 샛강에서 물놀이도 하고 까마중이라는 조그만 열매도 따먹으며
즐거워 했었다.
우리가 걷는 이유는 걸어온 댓가로 남은 회수권으로 떡복이를
사먹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먹었던 떡볶이의 맛은 말로 표현못할 맛인데 얼핏본 기억에
갈색빛이 나는 엿을 넣었던것 같았었다.
지금 떡볶이에 금을 넣고 만든다 해도 그때의 맛에는
비교가 안될만큼 달콤하고 쫀득하고 살살녹는 맛이었다.
지금의 여의도 공원은 그 옛날 오일육광장이라 불렀었다.
그 오일육광장에서 1시간에 얼마씩 주고 자전거를 빌려타고
내 세상인양 광장을 휩쓸고 다니기도 했었다.
여의도 윤중로에 있는 벗나무가 내 키정도나 조금더 컸을때에는
오일육광장에서 국군의 날 행사만 있었을 뿐이 었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는 유명한 벗꽃축제가 열리며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이제 곧 열리는 벗꽃축제에 꼭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든다.
벗나무와 함께 꿈을 먹고 커왔고,
서로 서로 알아보고 인사할 수 있나 확인해야 할것 같다.
삶이란 열정의 또 다른 이름이다.
벗나무의 열정적인 삶에 박수를 보낸다.
연우(煙雨 ; 안개처럼 내리는 비)가 내리는 날
벗나무와 함께 걸으며,
카타르시스를 (catharsis ; *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고
간접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과 슬픔이 해소되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일.
* 정신 분석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나 상처를 언어나 행동을 통해
외부로 드러냄으로써 강박 관념을 없애고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
느끼고..........
또 느끼고 싶다...................................